
지강헌(池康憲, 1954년 2월 8일 ~ 1988년 10월 16일)은 1988년 교도소 이감중에 도망쳐 서울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탈주범이다. 출생지는 전라남도 광주시이며, 본관은 충주이다.
지강헌은 어렸을때부터 매우 가난했으며 돈이 부족해 초등학교때까지만 공부하고 그 이상 부터는 돈이 부족해 공주를 하지 못하였다고한다. 지강헌에게는 동생이 있었는데 돈이 부족하여 지강헌이 그 당시 300만원 상당의 물품을 훔쳐 교도소를 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이후 지강헌은 88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8년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송되던 25명중 12명이 탈출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는데, 보호감호제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50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기보다 70억 원 횡령을 한 전경환이 형기가 짧다는 데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한 것이다.

=전경환은 그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친동생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고있었으묘 이를 악용하여 70억 원을 횡령하였음에 불구하고 형기가 짧았던것이다=
탈출을 감행하고 이후 여러 가정집들을 옮겨가머 지내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여러 군데의 은신처를 전전하다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 아무개씨 의 집에 잠입해서 고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생중계 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지강헌 (당시 35세)
안광술 (22세)
강영일 (21세)
한의철 (20세)

인질로 잡혀있던 가장(家長) 고 아무개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 150여m 거리의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바로 경찰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했으며 경찰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낮 12시경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호송교도관의 총을 빼앗아 자살했으며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항간에는 당시 경찰이 실수로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를 전달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자살시도 직후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으로 진입해 인질로 잡혀있던 가족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경찰진입과정에서 지강헌은 총 2발을 맞았고, 같은 날 세브란스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숨졌다.
끝까지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았던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비하인드 에피소드 지강헌의 형기는 꽤나 컷다 그러나 인질로 잡혔던 시민들이 탄원서를 넣어 형기가 줄어들었다고 한다

지강헌이 인질을 잡으며 인질에게 귓속말로 "미안해요 절대로 다치게 안할게요 이것만은 약속할게요 모두 안전히 나가게 할게요 이렇게 될줄 몰랐어요" 라고 한다.
우리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 한명이 잘못해서 감옥살이를 한다면 그 한사람이 잘못한것이 맞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힘들어하고 경제벌이가 힘들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잘 생각해 보아야한다.
지금까지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어지고있는데
어느 대기업 자식은 사고쳐도 집형유예
어느 중산층 자식은 사고치면 실형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우리가 바른 정신을 가지고 바꾸어 나아가야만 이런 것들을 바꿀수있다. 시민의 밝은 정신이 나라를 바꾼다.